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7대 대통령 선거 (문단 편집) === [[지역감정]] 문제 대두 === >'''[[전라도]]가 받은 차별은 약 [[백제멸망전|1300여년 전부터이다.]] 서울 [[남산(서울)|남산]]에서 돌을 던져 [[부자|차가 맞으면 경상도 사람 차요]], 사람이 맞으면 [[가난|전라도에서 올라온 식모와 구두닦이다.]][* 다소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어느 정도는 현실에 맞는 발언이었는데, 실제로 전라도 지역은 대부분이 농촌이라 일자리가 없어서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는데, 대부분은 식모나 구두닦이 같은 3D 업종에 종사했고 그로 인해 전라도 주민들은 '가난하고 못배우고 못살고 더럽다'라는 식의 편견이 사회에 널리 퍼졌다. 그래서 1990년대까지 TV 드라마에서 3D 업종의 종사자나 조직폭력배들은 죄다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으로 설정되었고, 이런 설정이 1990년대에 들어서 전라도 주민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 >김대중, 1971년 4월 대선 유세 중[* 유세 중 당시 김대중 후보 본인이 '''직접''' 스스로 한 말이다.] >'''천년 [[신라]] 후손을 뽑아 경상도 대통령을 만들자.''' >---- >[[이효상]]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 당시 [[신민당(1967년)|신민당]]은 1960년대 중순부터 호남 푸대접론을 내세우고 있었다. 급기야 1969년 3선 개헌 반대 투쟁 유세 당시에는 김대중을 포함한 신민당 의원들이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01300329201020&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10-13&officeId=00032&pageNo=1&printNo=7391&publishType=00020|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이전 [[5대 대선]] 때에도 윤보선의 [[민정당]] 소속 [[김사만]] 의원이 '''부산, 대구에는 빨갱이가 많다.'''라는 발언을 해서 박정희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이 있다. 이렇듯 지역주의를 선동하는 식의 선거 전략은 여야를 가리지 않고 사용한 것이었다. '''경상도 정권을 타도하자'''는 말은 지금 해도 충분히 논란의 여지가 있을 주장이다.] 이렇듯 안 그래도 호남에서 형성 중이던 반여 정서는 호남 출신 김대중이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나서자 더욱 심화되었다.[* 김대중이 지역감정을 자극한 또 다른 사례로는 [[13대 대선]] 때 들고 온 [[4자필승론]]. 이건 빼도박도 못하는 김대중의 실책이다. 실제로 13대 대선 이전에 대구에서는 민주당계 정당이 총선에서 승리를 거둘 정도로 지역색이 심하지 않았다.] 박정희 측 또한 이런 자극성 유세몰이에 불난 집에 기름을 붓듯이 이전부터 [[이효상]] 등이 주장해왔던 '''신라 대통령론'''과 [[이후락]]의 [[중앙정보부]]에서 주도하여[* 이 전략에 [[엄창록]]이 가담했다는 주장도 있다.[[http://todayhumor.com/?humorbest_644868|#]] ] 선거 3일전 호남에서 영남인의 물품을 불매하기로 했다는 내용의 허위전단을 뿌려 선동하여 영남(특히 농촌지역)의 강한 지지를 이끌어 내었고, 이는 호남의 [[김대중]] 지지율에 비해 영남의 박정희 지지율이 더 압도적으로 높은 선거결과로 나타났다. 이로써 1967년 대선에서 처음 나타났던 영호남의 지역주의는 이번 선거에서 훨씬 강화되었다. 그러나 그런 지역주의에도 김대중은 당시에도 부산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부산직할시]][* 부산의 직할시 승격은 1963년이라 경남에서 분리되고 이미 10년 정도가 지나 있었다.]에서 40% 초중반으로 선전했고, [[경남]]에서도 [[충무시]], [[창원시]], [[마산시]] 등 당시 산업화로 인해 [[전라도]] 등 타지 출신 노동자들이 급증하던 지역에서 30% 후반을 득표하는 등 선전했다. 또 경상북도에서도 당시 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있는 [[대구시]]에서 30% 초반 정도 득표했다.[* 예외는 [[거창군]]인데 여기서도 [[거창 양민 학살사건]] 때부터 이어져온 보수정당 비토 성향 때문에 30% 정도를 득표했다.] [[전남]], [[전북]]에서도 박정희가 34~35% 정도 득표했으며, [[무주군]], [[진안군]], [[곡성군]]에서는 박정희가 1위를 차지했다. 또한 7대 대선 직후 치러진 [[8대 총선]]의 경우, 호남(여21 : 야13)이 오히려 영남(여26 : 야24)보다 여당세가 강하게 나타났는데, 이는 당시에도 [[부울경]]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었던 김영삼의 영향이다. 적어도 이때까지는 지역감정으로 인한 몰표성이 그나마 덜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막을 드러낸 지역주의는 [[중선거구제]]를 내세운 [[1970년대]]와 [[1980년대]]에는 주춤했다가, [[1987년]]의 [[13대 대선]]과 뒤이은 [[13대 총선]]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